웃음, 미소방

<펌>부부행복목사/유머설교

순수시인 2018. 5. 15. 22:01

  * 왜 못 먹습니까?
사료 제조회사에서 유기농 원료를 사용한 신제품
프리미엄 고급 개 사료를 만들었습니다.
신제품에 대한 제품설명회가 열렸습니다.
담당 직원의 화려한 설명이 끝나자 참석자가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.
참석자 : 정말 좋은 제품을 만들었는데 착각으로 사람이 먹는 일은 없을까요?
직원 : 그럴 일은 절대 없습니다. 사람이 실수로 먹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.
참석자 : 유기농 청정원료이고, 영양가 높고 위생적으로 제조된 사료라서 사람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?”
직원의 마지막 한 마디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.
직원 : 사람은 비싸서 못 먹습니다.
 
과연 그 비싼 개 사료는 판매에 성공했을까요?
점점 고가품을 선호하는 시대가 되고 있기에 그 건 알 수 없습니다.
기본에 만족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사치와 낭비에 빠져들게 됩니다.
개는 아무리 사랑스럽고 귀해도 개다워야 합니다.
아무리 삶이 풍성해져도 사람보다 비싼 음식을 개에게 먹이는 것은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.
삶이 옵션에 빠져들면 끝없는 불행의 늪에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.
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. (19:24)
오죽하면 성경에 이런 말씀이 기록 되었을까요?
점점 더 편하기를 바라면 숟가락질을 하는 것도 귀찮아 질 수 있습니다.
이 정도라면 산 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?
더 좋은 것, 더 큰 것, 더 빠른 것, 더 비싼 것, 더 나은 것이 아니라
지금에 감사하고 만족 할 수 있어야 합니다.
특별한 상황이 아닌 모든 상황에 적응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.
인생은 더 나은 것에 있지 않고 상황을 수용하는 능력에 달려있습니다.
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
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“ (빌립보서 4:12)
 
     * 금주 강의 효과
금주를 호소하는 운동가가 지역 사람들을 모아 강연회를 열었습니다.
강의 도중에 격한 감정으로 소리쳤습니다.
이 지역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누구입니까?
제일 큰 집을 가진 사람이 누구입니까?
성실하게 일 하는 여러분이 아닌 바로 술집 주인입니다.
옷을 최고로 잘 입는 사람은 누구입니까?
가장 비싼 차를 타는 사람이 누구입니까?
역시 술집 주인입니다.
그런데 그 돈들이 모두 어디서 나옵니까?  
바로 여러분한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.
여러분이 매일 지출하는 술값이 그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습니다.
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?
며칠 후 강연을 들었던 사람 하나가 거리에서 금주운동가와 마주쳤습니다.
그는 감동적인 강연을 잘 들었다고 하며 고맙다고 했습니다
금주운동가는 자신의 강연이 성공적이었다는 마음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대답 했습니다.
! 그러세요! 술을 끊으셨군요?”
금주운동가의 질문에 쑥스러워 하며 지나던 사람이 대답 했습니다.
아닙니다!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바로 다음 날 술집을 차렸습니다.”  
 
때로는 내가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.
그렇다고 선한 일을 그만 두어서는 안 됩니다.
다음에는 내가 기대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.
모든 약은 부작용이 있습니다.
시중에 판매 되는 약 중에 부작용이 없는 약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.
그럼에도 그 모든 약들이 판매 되고 있는 이유는
부작용 보다는 호 작용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.
선한일, 착한 일의 결과로 손해를 볼 수 있고,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.
그래도 선한 일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.
잘 한다고 한 일이 잘 못 될 수도 있습니다.
그렇다고 다시는 잘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.
성도와 교회는 세상을 구하고 영혼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.
하지만 그 선한 일에도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.
그 때는 포기하고 돌아 설 때가 아닌 더 선한 결심을 해야 할 때입니다.
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
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” (히브리서 10:25)
 
     * 천국과 지옥 사이 
천국과 지옥 사이에 담장이 있었습니다.
아침 순찰을 돌던 천국 경비 대장이
담장에 구멍이 생긴 것을 발견하였습니다.
천국 경비 대장이 지옥 경비 대장에게 따졌습니다.
! 니들이 죄인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서 구멍으로 죄인들이 불법 입국하잖아! 이 구멍 어떻게 할 거야?” 
지옥경비 대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따졌습니다
! 우리 쪽에서 구멍 낸 증거 있어?” 
천국 경비대장이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.
아니!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미친 사람이 어디 있어? 이 구멍 너희들이 책임지고 막아!”
우린 절대 못해.” 
좋아! 그럼 법대로 하자고!”  
천국 경비 대장의 마지막 말에 지옥 경비 대장이 씩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
그래? 법대로 하자고? 변호사, 판검사, 정치인들이 다 여기 있는 건 알고 있지?”
 
유머이긴 하지만 가장 정의로워야 할 법이 지옥에 있다는 것은
법으로 세상이 아름다워 질 수 없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.

다툼과 시비 끝에 사람들이 소리치는 법대로 하자!”는 것은
공평한 것도, 정의로운 것도, 바르게 해결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.
그저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의미입니다.
사건이나 일의 해결이고 뭐고 상관없이 상한 감정 풀이나 하겠다는 의미입니다.
성도는 매 순간 자신의 태도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.
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?
갈등의 해결인지? 화풀이 인지?
아주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 해결 보다는 화풀이를 선택 합니다.
그리고 화풀이의 부작용을 감당하지 못해서 더 큰 갈등과 아픔에 시달리게 됩니다.
법은 선한 사람들 때문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.
법의 시작 자체가 악인과 악한 사건들 때문입니다.
그래서 예수님은 법관에게 가기 전에 길에서 화해라고 말씀 하십니다.
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
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
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” (마태복음 5:25)
법으로는 아픔을 씻을 수 없습니다.
아픔과 상처와 갈등의 진정한 해결은 진리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